나로호가 내 인생을 바꿨다 - 16년 후 누리호를 보며
김솔
누리호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아침에 윤슬이를 등원시키고 인터넷 뉴스 헤드라인을 봤다.
"누리호 4차 발사 성공."
순간, 16년 전 기억이 쏟아졌다.
2009년 8월 25일.
나로호 1차 발사.
그 로켓 하나가 내 '보험'을 날려버릴 줄은, 그때의 나는 꿈에도 몰랐다.
혹시 지금,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 때문에 좌절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인생을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버린, 하지만 결국은 옳은 곳으로 데려다준 이야기다.
2009년 고3, 확신에 가득 찬 바보
"서울대 의대 아니면 안 갑니다."
수시 상담에서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담임 선생님이 깊은 한숨을 쉬셨다.
2009년, 의대 열풍이 정점을 찍던 시절이었다.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은 전부 의대를 노렸고, '서울대 의대'는 그중에서도 정점이었다.
전교 1등이라는 타이틀은 그 목표를 향한 확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다른 길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울대 의대 지역균형은 내신 만점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내 점수는 80점 만점에 78.5점.
의대는 어림없지만, 웬만한 서울대 자연계열은 합격권인 점수였다.
선생님과 부모님이 끈질기게 설득했다.
"일단 어디라도 지원해라. 정시 망하면 어쩌려고."
내 논리는 간단했다.
어차피 안 다닐 대학인데 왜 지원을 하냐.
결국 타협했다.
서울대 물리천문학부에 지원하기로.
정시에서 서울대 의대 갈 점수가 나오면 수시 면접에 안 가면 그만이니까.
물리천문학부를 고른 이유는 고작 이랬다:
- 공대 아님 (당시 공대에 대한 묘한 거부감이 있었다)
- 직전 3년 경쟁률 낮음
- 고3 때 갑자기 물리가 재밌어짐
- "서울대 물리학과"라는 말이 왠지 멋있었음
그 정도였다.
정시를 아무리 망쳐도 여기 걸어놓으면 되겠지.
내게 그 원서는 그저 '보험'이었다.
1차 합격 발표.
당연히 붙었다.
나로호의 배신
그런데 이상했다.
입시 사이트 오르비에서 예상 커트라인을 보는데, 물리천문학부 점수가 미친 듯이 올라 있었다.
수소문 끝에 알게 된 사실.
1차 합격자 24명 중, 내가 23등 아니면 24등.
심장이 철렁했다.
보험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절벽 끝이었다.
왜 갑자기 커트라인이 이렇게 된 거지?
원인을 찾아보니, 나로호였다.
2009년 8월 25일, 대한민국 최초 우주발사체 나로호가 발사됐다.
비록 실패했지만, 온 나라가 우주에 열광했다.
그 열기가 고스란히 물리천문학부 지원율로 이어진 것이다.
아이러니했다.
사실 나는 천문학을 '혐오'하는 수준이었다.
고2 시절, 짧았던 영광이 트라우마로 바뀐 사건 때문이었다.
과학경시대회 인천 예선에서는 과학고 학생들까지 제치고 당당히 1등을 거머쥐었다.
기세가 등등해서 본선에 나갔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행성 거리 계산' 문제를 마주하자마자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날의 충격 이후, 천문학은 내 인생의 블랙리스트이자 기피 대상 1호가 되었다.
그런데 그 천문학이, 나로호를 타고, 다시 발목을 잡았다.
대치동에서 만난 다른 세계
"어차피 떨어질 거야."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부모님 설득에 대치동 서울대 면접 학원에 다녔다.
인천에서 지하철로 1시간 30분.
학원비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 마음을 알 것 같다.
"그때 뭐라도 더 해줄걸" 하는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도 최선을 다해주셨던 거다.
학원에서의 경험은 낯설었다.
동네 수학학원만 다니던 나에게 대치동은 다른 세계였다.
서울대 1차 합격자들만 모인 반.
실력이 출중한 친구들.
자신감 넘치는 눈빛들.
나는 더 주눅이 들었다.
어차피 난 24명 중 23등인데.
"이제 공부 그만하고 싶습니다"
면접 당일.
이미 재수를 결심한 상태였다.
부담이 없었다기보단, 체념에 가까운 홀가분함이었다.
교수님이 물었다.
"대학 와서 뭐 하고 싶어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제 공부 그만하고 운동하고 싶습니다. 동아리도 하고 싶고요."
교수님들이 잠시 멈칫하셨다.
내 분위기를 눈치채셨는지, 더 이상 깊이 묻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 한마디가 내 상태를 전부 말해주고 있었다.
3년 내내 서울대 의대만 바라보며 달렸고, 번아웃이 왔고,
보험으로 지원한 곳의 면접장에서 나는 이미 다 내려놓은 상태였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불합격.
그런데 이상했다.
"어차피 안 다닐 대학"이라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말했는데,
막상 떨어지니까 가슴 한가운데 구멍이 뚫린 듯 공허했다.
마음 한편에 보험을 들어놓는다고 생각했는데, 그 보험이 사라지니 불안이 밀려왔다.
내가 너무 건방졌나. 다른 데 수시 썼어야 하나.
그해 나는 내신 평균 1.05등급, 전교 1등이었음에도 수시를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단 한 곳만 지원했다.
주변의 "다른 데도 넣어라"는 조언을 무시했다.
정말 확신에 가득 찬 바보였다.
보험 없는 겨울
재수를 시작하고 나서야 뼈저리게 알았다.
'보험' 없는 삶이 얼마나 시리고 추운지.
매일 아침 독서실 책상에 앉아 생각했다.
나로호 탓을 했지만, 사실 나를 떨어뜨린 건 로켓이 아니라 내 오만함이 아닐까?
"서울대 아니면 안 가"라며 기세등등하던 철없는 아이는 사라졌다.
그제야 비로소 이름값이나 자존심이 아니라, 내 인생을 내가 오롯이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현실이 어깨를 짓눌렀다.
불안했다.
또 실패하면 어쩌지? 그때는 핑계 댈 로켓도 없는데.
그렇게 1년.
묵묵히 불안을 견디며 독학재수 끝에 지방의대에 합격했다.
서울대 의대가 아니라서 아쉬웠다.
삼수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 그냥 받아들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 선택이 내 인생을 만들었다.
대학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딸 윤슬이가 태어났다.
외과 전문의가 되었고, 지금은 또 새로운 길을 찾고 있다.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서울대 물리천문학부에 붙었다면 물리학자가 됐을까?
삼수해서 서울대 의대에 갔다면 더 행복했을까?
알 수 없다.
다만 스티브 잡스가 2005년 스탠퍼드 졸업식에서 남긴 말이 16년이 지난 내게 가장 명확한 답을 준다.
"앞을 보며 점들을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뒤돌아볼 때만 연결할 수 있죠. 그러니 지금의 점들이 미래에 어떻게든 연결될 거라고 믿어야 합니다."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나로호, 물리천문학부 불합격, 재수, 지방의대, 아내, 윤슬이.
그때는 엉망으로 흩어진 점들 같았는데, 지금 뒤돌아보니 나라는 사람을 여기까지 이끌어준 하나의 선이 되어 있다.
열아홉의 나는 경험은 빈약한데 확신만 비대했다.
세상이 내 좁은 계획표대로만 움직여야 한다고 믿었던, 위험한 오만이었다.
하지만 그 견고했던 확신이 산산조각 난 덕분에,
역설적이게도 나는 내 인생에 찾아온 '다른 가능성'들을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다.
당신의 삶에 버려 마땅한 기억은 없다
누리호 뉴스를 보며 생각했다.
2009년 실패했던 나로호가 누리호가 되어 하늘을 날았다.
나도 비슷하지 않았나.
첫 수능 실패, 물리천문학부 불합격, 서울대 의대의 꿈 포기.
그 모든 실패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딸 윤슬이가 언젠가 자신만의 선택 앞에 설 것이다.
확신에 가득 차서 한 길만 고집할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변수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윤슬아, 네 삶에 버려 마땅한 기억은 없어. 실패한 선택도 결국 네 삶의 일부가 될 거야."
나로호가 실패했던 2009년 8월 25일.
그 로켓 때문에 내 보험이 날아갔던 그 해.
16년이 지난 지금, 그 기억조차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실패한 로켓도 결국 하늘을 난다.
당신의 실패한 선택들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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