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페트병 하나를 갖고 싶어했던 날, 그걸로 동화책을 만들었습니다
김솔
페트병 하나
올해 4월 12일 일기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페트병 가지고 흙장난하는 아이들을 보며 자기도 하고 싶다고 했는데, 매점이 없어서 페트병을 구할 수 없어서 집으로 왔다. (…) 차에 페트병이 있어서 그거 가지고 나랑 둘이 나가서 집 근처 놀이터에서 흙장난하면서 재미있게 놀았다.
공원 놀이터에서 다른 아이들이 페트병에 흙과 물을 넣고 막대기로 젓고 있었습니다. 윤슬이가 그걸 한참 봤습니다. 자기도 하고 싶다는데 그 공원엔 가게가 없었습니다.
빈손으로 집에 왔는데, 차 뒷자리에 빈 페트병이 하나 굴러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는 아무것도 해준 게 없습니다. 사준 것도, 만들어준 것도 없습니다. 그냥 차 문을 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 윤슬이가 "오늘 다 재미있었어"라고 했습니다.
그 하루를 스물네 쪽짜리 그림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지어낸 장면은 하나도 없습니다. 일기에 있는 것과 그날 찍은 사진에 있는 것만 썼습니다.
화풍을 두 가지로 그렸습니다
같은 원고, 같은 장면, 같은 구도입니다. 그리는 재료만 다릅니다.
- A — 선이 또렷하고 색이 진한 쪽. 제가 인스타툰에서 쓰던 결입니다.
- B — 선 없이 물감으로만 번지는 쪽.
두 가지를 다 올려둡니다. 다 보시고 어느 쪽이 더 좋은지 댓글로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A · 선이 또렷한 쪽
윤슬이랑 공원에 가는 날이었어.
꽃이 아직 남아 있었어.
놀이터는 시끌시끌했어.
그런데 저기, 뭘 하는 걸까?
페트병에 흙을 넣고, 물도 조금 넣고,
막대기로 휘휘 젓고 있었어.
윤슬이가 멈춰 서서 봤어.
한참을, 꼼짝도 안 하고.
“아빠, 나도 병 갖고 싶어.”
아빠가 두리번두리번.
여기엔 가게가 없었어.
병도 없었어.
“집에 가자.” 아빠는 그 말밖에 못 했어.
주차장까지 아무 말도 안 했어.
뒷문을 열던 아빠가 멈췄어. “어?”
뒷자리에, 빈 페트병이 하나!
윤슬이 발이 갑자기 빨라졌어.
흙 한 줌.
물도 조금.
막대기로 휘휘.
뱅글뱅글, 뱅글뱅글.
까르르,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어.
해가 넘어갈 때까지 놀았어. 창문에 하나둘 불이 켜졌어.
목욕을 하고 나서, 윤슬이가 그랬어. “오늘 다 재미있었어.”
B · 선 없이 물감으로
윤슬이랑 공원에 가는 날이었어.
꽃이 아직 남아 있었어.
놀이터는 시끌시끌했어.
그런데 저기, 뭘 하는 걸까?
페트병에 흙을 넣고, 물도 조금 넣고,
막대기로 휘휘 젓고 있었어.
윤슬이가 멈춰 서서 봤어.
한참을, 꼼짝도 안 하고.
“아빠, 나도 병 갖고 싶어.”
아빠가 두리번두리번.
여기엔 가게가 없었어.
병도 없었어.
“집에 가자.” 아빠는 그 말밖에 못 했어.
주차장까지 아무 말도 안 했어.
뒷문을 열던 아빠가 멈췄어. “어?”
뒷자리에, 빈 페트병이 하나!
윤슬이 발이 갑자기 빨라졌어.
흙 한 줌.
물도 조금.
막대기로 휘휘.
뱅글뱅글, 뱅글뱅글.
까르르,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어.
해가 넘어갈 때까지 놀았어. 창문에 하나둘 불이 켜졌어.
목욕을 하고 나서, 윤슬이가 그랬어. “오늘 다 재미있었어.”
만든 방법
원고가 먼저였습니다.
옵시디언에 매일 일기를 씁니다. 올해 4월 12일 일기를 열어놓고 Codex와 같이 스물네 쪽 분량의 글을 짰습니다. 어느 장면을 몇 쪽에 넣을지, 어디서 페이지를 넘길지를 정하는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림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순서를 반대로 하면 그림에 글을 맞추게 되고, 그러면 글이 그림을 설명하는 자막이 됩니다.
캐릭터를 먼저 만들었습니다. 윤슬이 사진 몇 장으로 정면·45도·전신이 들어간 캐릭터 시트를 한 장 만들고, 그걸 기준으로 스물네 컷을 한 컷씩 이어 그렸습니다. 컷을 만들 때마다 직전 컷을 참고 자료로 같이 넣었습니다. 그래야 옷과 머리와 신발과 페트병이 스물네 쪽 내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글은 그림 안에 넣지 않았습니다. 그림은 그림대로 만들고, 활자는 나중에 따로 얹었습니다. 표지만 예외로 제목을 그림과 함께 만들었습니다.
얼굴은 안 닮았습니다
사진처럼 똑같이 그리는 건 잘 안 됐습니다. 몇 번 해보다 접었습니다.
대신 늘 입는 맨투맨과 청바지, 분홍 구두와 노란 양말을 그대로 넣었더니 그제야 윤슬이가 됐습니다. 아이를 알아보게 하는 건 얼굴이 아니라 그 아이 하면 떠오르는 옷과 물건이었습니다.
현관도 그랬습니다. 처음엔 상상으로 그렸는데 몇 번을 고쳐도 어색했습니다. 우리 집 현관 사진을 한 장 넣으니 한 번에 맞았습니다.
어느 쪽이 좋으세요?
A인지 B인지 댓글로 알려주시면 그걸로 정하려고 합니다.
뉴스레터 구독
새 글을 이메일로 받아보세요
새로운 글이 발행되면 이메일로 알림을 받아보세요. 언제든지 구독 취소가 가능합니다.
이 글이 도움이 되었나요?
관련 글

'언젠간 바꿔야지' — 의자가 넘어간 날, 아이에게 배운 것
'언젠간 바꿔야지.' 흔들리는 의자를 볼 때마다 했던 말. 그 '언젠간'이 쿵 소리와 함께 찾아온 날, 43개월 아이가 의사 아빠에게 가르쳐준 것.
아이 열날 때 해열제, 언제 먹여야 할까? ('36.5도'에 집착하다가 부모가 놓치는 것들)
38.5도인데 해열제 먹여야 할까? 응급실 의사 아빠가 알려주는 '체온계 숫자보다 중요한 진짜 판단 기준'. 밤새 열나는 아이 곁에서 불안한 부모님을 위한 안내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단추를 채운다 - 육아와 독립, 의사에서 1인 개발자로
육아의 목표는 아이의 독립. 그렇다면 내 인생의 목표는? 14년간 의사로 살다 퇴사하고 1인 개발자가 된 아빠가 아이의 단추 끼우기에서 깨달은 것. 성숙한 사랑과 홀로서기에 대한 육아 에세이.